| 이때 우수수 하는 소리에 그들은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바람소리다.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은 더욱 요란하다. |
| "아무턴 긴급한 지령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 |
| 선비는 두 다리가 후르르 떨리며 가슴이 무섭게 둘렁거린다. 더구나 언니 겸 동무이던 간난이가 그의 앞을 떠나갈 생각을 하니 눈이 캄캄하였다. |
| "선비야,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싸워야 한다! 너도 맹세하였지?" |
| 간난의 눈은 흥분으로 빛났다. 그리고 선비의 볼에 볼을 맞대었다. |
| "염려 마라! 나가서 몸조심해라!" |
| 선비는 간난이를 쓸어안았다. 간난이는 선비의 눈물을 씻어 주었다. |
| "선비야! 어떠한 일이 있다더라도 낙심 말고 싸워야 한다. 이렇게 눈물 흘려서는 못쓴다. 대담해라. 어서 난 가야겠다……." |
| 그들은 변소 밖을 나섰다. |
| 간난이와 선비는 살살 기어서 담 밑까지 왔다. 그리고 간난이는 바짓가랑이 속에서 밧줄을 꺼내 들었다. |
| "네 어깨에 올라설 테니 단단히 힘을 써라. 그리고 이 밧줄을 꼭 붙들어 다오." |
| 그때 바람이 휙 몰아온다. 그들은 사람의 신발 소리인가 싶어 휙근 돌아보았다. 바람은 점점 기세를 더하여 불었다. 그들은 바람 소리로 알았을 때 겨우 안심은 하였으나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이 차왔다. 그리고 번번이 바람 소리인 줄은 알면서도 바람이 불 때마다 뒤에서 감독이 칵 내닫는 듯하고 그들의 몸에 어떤 손이 감기는 듯하여 등허리에서 땀이 버쩍 나곤 하였다. |
| 선비는 담 밑에 붙어 앉았다. 간난이가 선비 어깨에 올라서자 선비는 담을 붙들고 일어나려 하였다. 선비의 양 어깨가 빠지는 듯만 했지 아무리 힘을 들이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선비는 몇 번 만에 겨우 일어났다. 간난이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일어세우며 담 위를 붙들기는 했으나 몸을 솟구는 수가 없었다. 그는 손에 든 밧줄을 입에 물고 두 팔로 담 위를 꼭 붙든 후에 다시 몸을 솟구었으나 힘만 들 뿐이고 손에는 땀이 나서 손이 미끄러워 떨어질 듯하였다. |
| 간난이가 몸을 솟구려고 움찔하는 바람에 선비가 푹 거꾸러졌다.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고 간난이까지 떨어져 굴렀다. 선비는 얼른 간난이를 일어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바람만 지동치듯 불 뿐이었다. 이런 때에 그 바람 소리는 자기들을 위하여 부는 듯하여 다행하였다. |
| "내가 나간 담에 이 신을랑 넘겨 다우!" |
| 선비는 머리를 끄덕이며 여전히 담에 손을 대고 앉았다. 간난이가 선비의 어깨에 올라서서 다시 담 위를 붙들었을 때 휙 하는 휘파람 소리가 나는 듯하므로 간난이는 놀랐다. 그러나 선비는 어깨에 힘을 쓰기 때문에 그 소리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간난이는 이 소리가 담 안에서 나는 소린지, 담 밖에서 나는 소린지, 혹은 바람 소리가 그렇게 들리는지 하여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들었다. 그 휘파람 소리는 어떻게 들으면 담 안에서 나는 것 같고, 또다시 들으면 담 밖에서 나는 듯하였다. 간난이는 몸을 솟구지도 못하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봄바람이 되어 그 기세가 무서웠다. 간난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머리까지 담에 꼭 붙이고 휘파람 소리를 분간하여 들으려 하였다. |
| 한참 후에 그 소리는 바람 소리인 것을 짐작하며 간난이는 힘껏 몸을 솟구었다. 그러나 솟구어지지 않았다. 한참 후에 간난이는 선비의 어깨만은 벗어났으나 아직도 담 위까지는 못 올라왔다. 아래서 선비는 발돋움을 하고 손으로 간난의 밑을 받들어 주었다. 이렇게 애쓰기를 거의 한 시간이나 넘어서 간난이는 비로소 담 위에까지 올라왔다. 선비는 밧줄을 꼭 붙들었다. 밧줄이 몇 번 잡아쓰이우더니 담 위에 올라섰던 간난이는 보이지 않았다. 선비는 얼른 신을 밧줄에 동여서 올려 치쳤다. 북북 소리를 바람결에 이따금 던지며 밧줄조차 어둠 속에 감추어졌다. 선비는 이마에 땀을 씻으며 사면을 살폈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쉰 후에 불행히 간난이가 어디 상하지나 않았는지? 하는 불안에 담 밑에 붙어 서서 간난의 신발 소리를 들으려 하였다. 반면에 이편 담 안에는 누가 숨어서 이 모든 것을 보지나 않았는가 하여 역시 주의를 하여 살펴보았다. 공장의 소음을 섞은 바람만이 그의 타는 듯한 볼에 후끈거릴 뿐이고 아무 소리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까보다 무서운 생각이 한층 더하였다. 그리고 그의 방까지 갈 것이 난처하였다. 어둠 속 저편에는 감독의 그 눈알이 선비를 노려보는 듯하고, 그리고 그의 신발 소리가 뚜벅뚜벅 들리는 듯하였다. 그는 담을 붙들고 서서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발길을 옮겼다. |
| 그는 그의 방까지 아무 변동 없이 잘 들어와서 자리에 누웠다. 베개 위에 볼이 선뜻 하고 닿을 때 뜻하지 않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는 이렇게 무사히 방까지 들어와서 누웠으나 바람결에 유리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누가 방문을 열지나 않나? 그리고 너희년네가 간난이를 내보냈지 하고 위협하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간난이가 저 무서운 바람을 안고 지금 어디로 분주히 갈 터이지! 하였다. |
| '간난아! 간난아!' 선비는 몇 번이나 입 속으로 간난이를 불렀다. 웬일인지 선비는 간난이를 다시는 만나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더구나 앞으로 일해 갈 것이 난처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얼마든지 많았다. |
| 이튿날 아침 기숙사에서는 무슨 큰일을 만난 듯하였다. 간난이와 함께 있던 여공들은 감독이 불러다가 위협을 하다하다가 나중에는 때리기까지 했단 말이 돌았다. 그래서 이 모퉁이를 가도 수군수군, 저 모퉁이를 가도 수군수군하였다. |
| 선비는 감독이 그를 부를 터이지 하고 하루 종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일이 손에 붙지를 않고 툭하면 실이 끊어지곤 하였다. 평시에 간난이와 친하던 동무며, 간난의 방 옆에 있는 여공들까지 다 불러가나, 웬일인지 선비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니 선비는 한층더 가슴이 설레었다. 간난이와 그가 친하다는 것은 온 기숙사가 다 아는 터이고, 물론 감독까지도 잘 알 터인데,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선비를 먼저 부를 줄 알았으나 해가 지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니 도리어 선비는 겁이 나고 이상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
| "이애 뭘 잘했지! 여기 있으면 뭘 하니." |
| "잘하기야 열 번 스무 번 잘했지만, 글쎄 어떻게 나갔는지, 참 귀신이 놀랄 일이 아니냐." |
|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는지 뉘 아니? 그래서 데려나간 게지……." |
|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드라도 하여간 그 높은 담을 넘지는 못했을 터이고 어데로 나갔겠니……?" |
| 식당에서 밥을 먹는 여공들은 이렇게 하늘이 무너져도 못 나가는 것으로 알았던 그들에게 비상한 센세이션을 일으키었다. |
| "선비야, 넌 알겠지? 그러니 너보고야 말하고 나갔겠지, 그렇지?" |
| 선비와 마주앉은 농 잘하는 여공이 선비를 보며 웃음 섞어 말하였다. 선비는 그가 미리 알고 말하는 것 같아서 다소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머리를 숙여 그를 피하였다. 그리고 밥에 돌을 고르는 체하다가 머리를 들며 빙긋이 웃었다. |
| "간난이가 나가면서야 나두 나가자고 하는 것을 나는 이 공장에서 일하기가 퍽 좋아서 안 나갔단다." |
| 그들은 허허 호호 웃었다. |
| "사실이지 나갈 수만 있다면 나두 나가겠다. 그까짓것 여기 있어 뭘 해." |
| "이애 간난이가 요새 선비하고 덜 좋아했단다. 내 말을 하리?" |
| 눈까풀 얇은 여공이 선비를 말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오물오물 놀렸다. 선비는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으면서 전 같으면 얼굴이 붉어질 것이나 지금에 있어서는 여공들이 그렇게 해석해 주는 것이 도리어 다행하였다. |
| "말할까? 말까?" |
| 눈까풀 얇은 여공은 웃음을 띠고 물었다. |
| "이애 넌 무슨 말을 하랴면 속시원하게 얼른 하지, 고 버릇이 무슨 버릇이냐. 주리틀게 눈치만 살살 보면서 무슨 말이기에 그 모양이야? 극상해야 감독이 선비를 고와한단 말이겠구나. 그까짓 말에 그리 얌통을 부릴 게 없지 않니? 왼 기숙사가 다 아는데……." |
| 얼굴 긴 여공은 이렇게 말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밥만 푹푹 퍼넣는다. 선비는 왼 기숙사가 다 아는데…… 하는 그의 말에는 다소 불쾌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여러 말 하기는 선비의 가슴이 너무나 복잡하였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웃어 보이고 말았다. |
| 선비가 식당에서 올라왔을 때, |
| "선비!" |
| 하고 사무실에서 감독이 불렀다. 선비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그리고 감독이 물으면 대답하려고 어제 밤새도록 준비하였던 말이 어디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선비는 어쩔 줄을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
| "죄 없으면 일없지, 무슨 걱정이야." |
| 옆에서 바라보는 동무가 이렇게 말하였다. 선비는 다리가 가늘게 떨렸다. |
| "방에 선비 없어!" |
| 재차 부르는 소리를 듣고야 선비는 발길을 떼었다. 그가 문밖을 나서며 다는 얼굴을 부비쳤다. 그리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였으나 자꾸 뛰놀았다. 선비는 안타까웠다. 그래서 그는 한 발걸음에 주저하고 두 발걸음에 망설였다. '내가 이래 가지고야 앞으로 일해 갈 수가 있나? 나는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 거짓말을 곧잘 해야 한다!' 선비는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
| 감독은 궐련을 피워 물고 들어오는 선비를 바라보자 빙긋이 웃었다. 선비는 마음껏 용기를 내어 가만히 서 있었다. 감독은 기침을 하고 말을 꺼냈다. |
| "요새 어디 앓었는가?" |
| 선비는 뜻밖의 물음에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머리를 조금 들고 감독을 바라보았을 때 보기 싫게 눈을 흘금거리는 호랑이 감독이 아니라, 공장 안에서 까불이라고 별명이 있는 고감독이었다. 선비는 다소 맘을 가라앉히었다. 고감독은 체가 적으니만큼 까불기는 하나 눈치가 빨라서 여공들이 가장 친하게 대하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
| "왜 얼굴이 전만 못하구먼. 몸간수 잘해야 해." |
| 감독은 기침을 칵 하고 나서 선비의 숙인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요새 동료들 중에 암투의 초점인 이 계집! 언제도 새로운 미를 또다시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장차 저 계집은 누구의 손에 쥐어질지 모르나 어쨌든 지금 동료들끼리 맹렬한 알력을 계속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각기 기숙사 당번을 즐겨 하고 집에 나가기를 싫어하였다. 그리고 서로 질시가 심하니, 누구나 적극적으로 선비에게 대들지는 못하고, 다만 선비의 호의만 사려고들 애썼던 것이다. |
| "여기 좀 앉아, 응 자." |
| 까불이는 의자를 버쩍 들어 옮겨 놔주었다. 선비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그의 치마 주름을 내려쓸고 있었다. 그리고 감독의 입에서 어서 간난의 말이 나와서 얼른 대답을 한 후에 감독 앞을 벗어나고 싶었다. 선비는 감독만 대하게 되면 어쩐지 어렵고, 덕호를 대하는 듯한 불쾌감이 그를 싸고도는 듯하였던 것이다. |
| "선비, 이번 나간 간난이와 한고향이라지?" |
| "예." |
| "나가기 전에 선비보고 무슨 말이든지 하던 말이 없던가?" |
| 약빠른 까불이 감독이 그의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저렇게 묻는 듯싶어 얼굴이 활짝 달아 왔다. 그리고 어떻게 대답할까 하고 두루두루 생각하다가, |
| "그저…… 무심히 대하였으니 지금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
| 까불이는 눈을 깜박깜박하고 나서, |
| "별다른 말이 아니라…… 말하자면, 공장에서 일하기 힘든다든지 어느 감독이 몹시 군다든지, 그러한 불평을 말하지 않던가?" |
|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
| "음." |
| 까불이는 선비의 임금빛 같은 두 볼을 바라보면서, 저 계집을…… 하고 안타깝게 생각되며 몸이 달았다. 그래서 단박에 달려들어 그를 쓸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들의 동료 중에 그 어느 누가 알든지 하면, 두말도 없이 상부에 보고되어 생명줄이 떨어질 것이 무서웠다. |
| "간난이가 저렇게 나간 것을 선비는 어떻게 보는가?" |
| 까불이는 선비의 태도를 보아, 그리고 그의 의젓한 성격을 미루어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더구나 딴 방에 있었으니 선비는 모를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선비와 이렇게 마주앉고 이야기하기 위하여 일부러 불러 놓고는 이리저리 묻는 것이다. 동시에 선비가 어느 정도로 자기에게 호의를 가졌는가? 하여 눈치를 살살 보았다. |
| "잘못된 행실이지요." |
| 선비는 맘에 없는 말을 겨우 빼었다. 감독은 빙그레 웃었다. |
| "암! 잘못된 행실이구말구. 계집이 혼자 나갈 수는 없고 어떤 놈과 짜구 나갔을 게야. 제가 혼자서야 어디로 나가?…… 이감독이 자네보고 하는 말 없던가?" |
| 이 말을 미루어 감독 자기네끼리도 의심하는 모양이다. |
| "없어?" |
| 다시 한번 채쳐 물었다. 선비는 입에 손을 대고 기침을 가볍게 하였다. 그리고 감독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는 것을 짐작하며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
| "응 왜? 대답이 없어. 뭐라고 말하지 않아?" |
| "예!" |
| "덮어놓고 예, 예만 하니까 알 수가 있나? 이번 일에 대하야 선비에게 뭐라고 묻지 않아?" |
| 치근치근한 이감독의 성질에 선비를 불러다 놓고 뭐라고 물었을 것이 틀림없는데 선비가 이감독과 벌써 무슨 약조가 있는 새가 되어서 저렇게 숨기나?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선비는 간난이가 일상 하던 말이 문득 생각히었다. "감독을 만나면 너는 뾰로통해만 있지 말고 더러 웃는 체도 해보이렴. 그래서 네 태도를 저들이 분간하지 못하도록 하여라." 선비는 간난의 말이 우스워서 빙긋이 웃었다. 그때 층계를 올라오는 구두 소리……. |
| 감독은 정색을 하였다. |
| "아주, 간난이가 나간 일에 대하여서는 모른단 말이지…… 나가!" |
| 선비는 말이 떨어지자 곧 나왔다. 그리고 그의 방까지 왔을 때 감독의 방에서 두런두런하는 이야기 소리가 들려 왔다. 그의 동무들은 선비가 무슨 말을 할까 하고 그의 입술만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
| "뭐라던?" |
| 선비는 자리를 내려 폈다. |
| "뭐라기는 뭐래, 그저 그 말이지." |
| "왜 야학에 안 가련?" |
| "몸이 좀 아프구나." |
| "어데가?" |
| "글쎄…… 맥이 없어." |
| 그들은 풀기 없는 선비를 보며 감독에게서 단단한 나무람을 들은 듯하였다. 그리고 자기들도 감독에게 불림을 받을까? 하는 불안에 눈에 겁을 머금고 밖으로 나갔다. |
| 선비는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맥을 놓으면 몸이 오슬오슬 추우면서도 이마에는 땀이 척척하게 흐르곤 하였다. 이런 때마다 그는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웠다. 그의 어머니와 단둘이서 살던 그 초가! 나무 반 단만 넣으면 잘잘 끓던 그 아랫목! 그 아랫목에서 이불을 막쓰고 땀을 푹 내었으면 그의 몸은 가뿐해질 것 같았다. |
| 그가 한참 자고 어느 때인가 눈을 번쩍 뜨니 유리창에 달이 둥글하였다. 그는 이마에 척척하게 흐른 땀을 씻으며 달을 향하여 누웠다. 아까 감독이 묻던 말을 다시금 생각하니 그는 감독이 그를 의심하지 않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그 일 때문에 졸이던 맘은 좀 풀리나, 그러나 어깨가 무겁도록 짊어진 이 사명을 어떻게 하여야 잘 이행할 것이 난처하고도 답답하였다. 간난이가 가르쳐 주던 공장 내부 조직 방침, 밖의 동지들과 민활하게 연락 취할 것, 그리고 밖에서 들어오는 문서며 삐라 등을 교묘하게 배부할 것 들이 그의 머리에 번갈아 떠오른다. 한참이나 생각하던 선비는 좀더 있다가 간난이가 나갔으면 내 이렇게 답답하지 않을 것을…… 하며, 그가 무사히 나갔는가 하였다. 그리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렇게 가분작이 간난이를 불러냈는가?…… 그들이 혹 잡히지나 않았는지? 할 때, 적지 않은 불안이 일었다. 동시에 미지의 동지들이 모두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와 같은 그런 사람인지도 모르지? 혹 첫째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인 것을 자기가 모르는가…… 하였다. 그러나 그때 월미도 가는 길에서 첫째를 만났을 때 일을 미루어 생각하니, 첫째는 어떤 공장 내에 있지 않고 그날그날 품팔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웬걸 지도자를 만났으리…… 아직도 그는 암흑한 생활 속에서 그의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동분서주만 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선비는 첫째를 꼭 만나 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계급의식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 그는 누구보다도 튼튼한, 그리고 무서운 투사가 될 것 같았다. 그것은 선비가 확실하게는 모르나 그의 과거 생활이 자신의 과거에 비하여 못하지 않은 그런 쓰라린 현실에 부대끼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도적질을 하는가?…… 지금 생각하니 어째서 그가 도적질을 하게 되었으며, 매음부의 자식이었던 것을 그는 깊이 깨달았다. 그러니 선비는 어서 바삐 첫째를 만나서 그런 개인적 행동에 그치지 말고 좀더 대중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그가 인천에나 있는지? 혹은 딴 곳으로 갔는지? 왜 나는 시골 있을 때 그를 무서워하였던가?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가 소태나무 뿌리를 캐어 들고 새벽에 찾아왔던 기억이 떠오르며 소태나무 뿌리를 윗방 구석에 던지던 자기가 끝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느글느글한 덕호가 주던 돈을 이불 속에 넣던 자신을 굽어볼 때, 등허리에서 땀이 나도록 분하고 부끄러웠다. 그뿐이랴! 마침내는 그에게 정조까지 빼앗기고 울던 자신!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던 자기!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었는가! 그리고 그 덕호를 보고 아버지! 아버지! 하며 부르던 그때의 선비는 어쩐지 지금의 자기와 같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이때껏 의문에 붙였던 그의 아버지의 죽음이 얼핏 떠오른다. 옳다! 서분 할멈의 말이 맞았다! 그는 무의식간에 벌떡 일어났다. 그때 손끝이 몹시 아파 왔다. 그래서 손끝을 볼에 대며 덕호를 겨우 벗어난 자신은, 또 그보다 더 무서운 인간들에게 붙들려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며, 오늘의 선비는 옛날의 선비가 아니라……고 부르짖고 싶었다. |
| 아버지와 면회를 하고 돌아온 신철이는 감방문 닫히는 소리를 가슴이 울리게 느끼며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가 처음으로 이 방에 들어올 때 저 문 닫히는 소리란 기가 막히게 그의 자존심을 저상시켰으며 반면에 비창한 결심까지 나도록 반발력을 돋아 주었는데, 오늘의 저 닫히는 소리는 그의 자존심이 이때까지 허위요 가장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버지의 그 초라한 모양이 안타깝게 떠오른다. 아버지는 그로 인함인지 혹은 생활난으로 인함인지 이태 전과는 아주 딴 사람을 대하는 듯하였다. 아버지의 그 옷 모양이며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 얼굴! 아들을 대하자 아무 말도 못 하고 눈가가 뻘개서 바라만 보던 그 눈! 그때의 아버지의 심정이야말로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그의 가슴속에 뚜렷하였다. 일 초, 이 초 지나는 동안에 부자는 언제까지나 입을 열지 못하였다. 한참 후에 신철이는, |
| "영철이 잘 있나요?" |
| 그때 아버지는 눈물이 그뜩해지며, |
| "응, 응." |
| 하고 어리뻥뻥하게 대답을 하면서 머리를 돌려 버렸다. 아버지의 모호한 그때의 대답을 들을 때 신철이는 가슴이 선뜻해지며 그놈이 죽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들었던 것이다. |
| "미루꾸 사주!" |
| 하던 그 음성도 다시 듣지 못할 겐가? 하며 신철이는 벽에 의지하여 눈을 꾹 감았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
| "너 박판사를 만나 보았니?…… 박판사의 말대로 하여…… 응, 공연한 고집 부리지 말고……." |
| 말을 마치자 면회는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그 떨리는 음성! 그것은 거의 애원이었다. 그리고 이때까지 그 어느 구석에 숨어 있던 그의 그 어떤 생각을 정면으로 찔러 주는 듯하였다. 어떻게 하나? 어제 만나 본 병식의 말대로 해버릴까? |
| 병식이는 그가 최후로 도서실에서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았던, 육법전서를 안고 외던 학생이었다. 그는 벌써 예심판사가 되었던 것이다. |
| 병식이를 만나는 첫 순간, 신철이는 적이 놀라면서도 반면에 그의 자존심이 강하게 동하였다. 보다도 억지로 그의 자존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에는 그가 권고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않았지만 일단 그와 마주앉아 있기가 왜 그리 불쾌하였는지 몰랐다. 그러므로 신철이는 머리를 돌린 채 그의 묻는 말에 한 마디도 대답지 않았다. 그러나 병식이는 그의 직무상 옛날 동무로서의 우정을 생각해서 그랬는지 어쨌든 간곡히 말하였던 것이다. |
|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아버지가 병식이를 찾아가서 간곡한 부탁이 있은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렇게 깨닫고 나니 병식이가 열심으로 지껄이던 말이 그의 머리에 명랑하게 떠오른다. |
| "우선 나부터도 이 자본주의 사회제도를 전부가 다 옳다고 긍정할 수는 없네. 따라서 이 제도를 부인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보겠다는 용감한 투사들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러나 이 제도를 없이하려면 상당히 오랜 역사를 요구하게 될 것이 아닌가. 즉 장구한 시일과 다수한 희생이 있어야 될 것은 자네가 더 잘 알 것일세. 그러나 이 같은 떳떳한 일을 위해서는 나 개인 하나는 희생한다고…… 하는 것이 남아로서 장쾌한 일이라고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게 되나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하면, 나 혼자가 더 그랬댔자 오늘낼로 곧 혁명이 될 것도 아니요, 또 안 그랬댔자 될 혁명이 안 될 것도 아니니, 이 세상에 한번 나서 어찌 나 개인을 그렇게도 무시할 수가 있는가? 더구나 자네나 나는 집안 형편이 딱하게 되지 않았는가…… 자네나 내가 없으면 집안 식구는 내일부터라도 문전걸식할 형편이니, 지금부터 이 감옥에서 십 년이 될지, 몇 해가 될지 모르는 그 세월을 희생할 생각을 해보게…… 요즘 일본에서도 ××당의 거두들이 전향한 것도 잘 알 터이지. 그들도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일세. 자네는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 병식이는 얼굴에 비창한 빛을 띠고 신철이를 바라보았다. 신철이는 그의 타산에 밝은 개인주의적 그 이론으로 자기를 설복시키려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일종의 모욕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였다. 이 눈치를 챈 병식이는, |
| "그러면 돌아가서 깊이 생각해 보게. 나는 나의 직무를 떠나 옛날의 우정을 가지고 진심으로 권하네……." |
| 그때 옆에 섰던 간수는 호령을 하였다. |
| "일어서!" |



